전망대 오르면 그림 같은 풍경이 탁
자욱한 억새밭 너머 낙동강 푸른 물
평원의 여왕 핑크뮬리 여행객 유혹
드넓은 벌판·풀숲은 겨울맞이 채비
주변 옥천저수지·천년고찰 관룡사
윤슬·만산홍엽으로 아름다움 뽐내

지각은 나름의 이유가 있고 장단점이 있다. 단점이라면 여유가 없고 좀 바빠진다. 예년과 달리 계절의 바통터치가 늦어지면서 단풍도 멀찌감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다가온다. 하지만 자연의 순행은 거스를 수 없는 법. 남지수변공원에 가을이 물들었는지 걱정하며 시동을 건다. 가는 길 바다이야기꽁머니 가로수마저 단풍이 든 것과 들지 않은 게 뒤섞여 얼룩덜룩하다. 그런데 함안 지나 남지철교를 건너는 순간 눈앞에 가을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남지수변억새전망대 표지판이 보였고 들판의 분홍억새가 바람에 하늘거리며 가을을 마중하고 있다.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곳. 창녕에서 만추의 축복을 온몸으로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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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남지수변억새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드넓은 벌판에서 하늘거리는 억새와 다채로운 풀숲, 낙동강 푸른 물길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도희주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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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남지수변억새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드넓은 벌판에서 하늘거리는 억새와 다채로운 풀숲, 낙동강 푸른 물길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도희주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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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강 나루터, 억새의 서사시를 듣다
남지철교 지나 남지초 릴게임5만 등학교 앞을 지난다. 노란색 스쿨존 위에 노란 은행잎이 떨어져 노면을 덧칠하는 듯하다. 초등생 장난꾸러기처럼 바람의 비질에 노란 잎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모습이 운동장에서 운동회라도 벌이는 것처럼 귀엽다. 도로변에 인접한 마을 공터는 한눈에 들어오는 파크골프장이다. 시니어 몇 분이 홀과 볼의 거리를 가늠하며 주춤주춤 스윙 자세를 가다듬는다.
저만치 눈에 들기 시작한 수변공원. 지난 계절 초록으로 무성했을 초목들이 벌써 옷을 갈아입고 여행객을 유혹한다. 자욱한 억새밭 너머로 언뜻언뜻 보이는 낙동강 푸른 물길이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듯하다. 조금 더 가니 ‘길끝’이라는 글자가 보이고 차들이 주차해 있다. 나그네도 그 뒤에 주차하고 삼각대를 챙겼다.

드넓은 벌판엔 억새들이 군데군데 무리 지어 있고 다채로운 풀숲이 눈길을 끈다. 핑크빛 솜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그것을 보러 여기까지 왔다. 분홍억새라고 부르기도 하는 그 정체는 핑크뮬리. 그 한가운데 한 척의 배가 정박 중이다. 아니 자세히 보면 배의 선수 부분만 있는 반쪽이다. 말하자면 뷰 포인트다.








남지수변억새전망대 가는 길





남지수변억새전망대 가는 길



‘남지수변억새전망대’는 낙동강의 랜드마크로 2014년 11월에 완공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입구 표지판 지나 광활한 강변을 스캔한다. 덱 로드 너머 풍경은 담백하다. 나목의 회백색 가지들도 강가를 응시하며 묵상 중이다. 표지판 옆엔 뜻밖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6·25전쟁 기음강전투 전적지’는 가운데 사진을 기준으로 상하 한글과 영문으로 표기되어 있다. ‘미합중국 육군 상사 어니스트 R. 코우마’가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공로를 기록해 놓았다.
‘남지수변억새전망대’가 평원 한가운데 멋진 모습으로 서 있다. 거기까지 뻗은 덱 로드를 따라 걷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상쾌하다. 전망대는 3층으로 보이는 육각형의 2층이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를수록 시야에 들어오는 자연의 속살이 새롭게 보인다. 꼭대기에 올라 내려다보는 수변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핑크빛 억새가 발아래에서 살랑이고 멀리 강변을 따라 늘어선 나무들, 그리고 더없이 맑은 하늘 아래 잔잔히 흐르는 하늘빛 강물은 마치 강이 하늘에서 시작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멋진 풍경의 하모니는 천연 에너지로 나그네의 몸과 마음속으로 흘러들며 충전되고 있다.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충만감. 다카하시 아유무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소중한 것을 깨닫는 장소는 언제나 컴퓨터 앞이 아니라 파란 하늘 아래였다”고.
◇강줄기를 따라가는 테마공원
강줄기를 따라 테마별로 블록화된 공원은 조형물과 자전거 길을 포함한 산책로, 야생초 화원, 테마초 화원 등이 자리하고 있다. 사진을 찍는 동안에도 지나가는 자전거, 억새 숲 사이를 지나가는 연인들, 여유를 한껏 부리며 걷는 중년의 부부들.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는 그들도 그림 속 풍경의 일부분이 된다.

억새 사이를 걷는다. 바람에 서걱이는 억새의 파노라마에 잠시 떠오르는 생각. 한때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로 시작하는 가요 ‘짝사랑’의 노랫말에서 ‘으악새’를 ‘으악 으악’ 우는 조류로 상상했던 웃지 못할 기억도 있었다. ‘으악새’는 ‘억새’의 경기도 방언으로, 표준어 ‘억새’가 아닌 방언의 ‘으악새’로 노랫말의 묘미를 살린 것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강물 따라 가면 하늘에 닿을 수 있겠다는 착시마저 든다. 군소의 메타세쿼이아들과 억새들은 강과 공원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부드러운 감촉의 핑크뮬리는 단연 이 평원의 여왕이었다.








갈바람에 하늘거리는 억새.





갈바람에 하늘거리는 억새.



잠시 걸어 나오다 돌아본다. 저만치 핑크뮬리 사이에 나룻배 모양의 조형물이 더 멋있어 보인다. 사실 그 나룻배는 기강 나루터의 상징이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왜적과 맞서 싸운 첫 승리의 장소라고 한다. 오랜 옛날엔 남지읍 사람들의 중요한 교통수단이기도 했던 나룻배. 낙동강과 남강의 합류 지점으로 ‘거름강’ ‘갈림강’으로 불리었다가 그 의미 그대로 ‘기강( 江) 나루터’가 정식 지명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에 등재됐다.

산책로를 걸으며 시간 여행을 떠난다. 나붓대는 억새들의 물결과 유유히 흐르는 강물로부터 옛터의 대서사시를 듣는다. 그림 같은 풍경 사이로 또 한 대의 자전거가 지나간다. 바람이 분다. 수변의 억새들과 나무들도 가벼운 몸짓으로 만추의 갈피를 넘긴다.








산책로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





산책로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



◇윤슬이 아름다운 옥천저수지
도천면사무소를 지나 영산도천로를 달린다. 농공단지다. 크고 작은 공장들과 농업의 현장이 적절하게 자리 잡고 있다. 영산면은 우리나라 양파 시배지이자 국내 최대 양파 주산지로 알려져 있다. 풍경이 확 달라진다. 늦가을이 무색할 정도로 들판은 초록의 줏대를 잃지 않고 있다. 곧 겨울이다. 겨울을 뚫고 나오는 양파와 마늘이라니. 눈여겨보면 양파와 마늘은 엄연한 차이가 있다. 도톰해 보이는 건 양파, 좀 뾰족한 건 마늘이다. 멀리서 보면 파크골프장으로 오인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무논은 또 어떤가. 그루터기는 뭉뚝뭉뚝 일정한 간격으로 볏논의 훈장이다. 그리고 여기저기 커다란 마시멜로가 햇볕을 튕겨내고 있다. 정식 명칭은 ‘볏짚원형곤포사일리지’다. 그 모습은 수확의 기쁨과 내년의 풍년을 기원하는 농부의 퍼포먼스 같기도 하다. 유년의 고향 땅 냄새가 훅 들어온다.








윤슬이 아름다운 옥천저수지.





윤슬이 아름다운 옥천저수지.



편도 1차로는 단풍나무·소나무·은행나무·메타세쿼이아 등이 마을처럼 띄엄띄엄 줄지어 있다. 그 사이로 간혹 수확하지 않은 감나무들의 모습이 끼어든다. 조금 더 가니 잡목 사이에 가려진 저수지가 드러난다. 송이버섯마을과 인접한 옥천저수지. 관룡산 유역의 물이 흘러드는 계곡형 저수지다. 1953년 착공해 1963년에 완공됐으며 창녕군 계성면과 장마면 일대 농업용수로 쓰인다. 정면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윤슬이 최상급이다. 나무 그늘에서 빛을 여과하고 잡은 앵글에 들어오는 윤슬. 찬란하다. 억새들의 은빛과도 견줄만하다. 일부 드러난 저수지 바닥에서 앵글을 잡고 싶지만 접근할 방법이 없다.
◇천년의 불심(佛心)이 전하는 메시지

앵글을 접고 최종 목적지를 향해 가속페달을 밟는다. 관룡산 자락은 만산홍엽이다. 창녕을 대표하는 천년고찰 관룡사. 주변 경관이 수려하며 소원을 잘 들어준다고도 하고 적어도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고 한다. 나그네는 불자는 아니나 합장해 한 가지 소원을 기원했다. 무슨 소원인지는 말할 수 없다. 그걸 밝히는 순간 무용지물이 된다고 하니까. 그런 걸 잘 믿지는 않으나 누구나 터부(taboo)를 어기면 찜찜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관룡사 일대는 관룡산(754m)과 구룡산(741m)의 능선이 이어진 화왕산(756.6m)군립공원의 일부다.








창녕을 대표하는 천년고찰 관룡사.





창녕을 대표하는 천년고찰 관룡사.



관룡사의 3단계 석축 돌들은 똑같은 모양과 빛깔이 없다. 다만 서로 평면으로 모나지 않게 각을 이루고 있다. 돌계단엔 낙엽들이 계절감의 정취를 대변한다. 관룡사를 올려다보며 앵글을 잡는 사이 관광버스에서 내렸을 한 무리가 왁자하게 다가온다. 다들 알록달록한 등산복 차림이다. 관룡사 관광을 겸한 화왕산군립공원 정상의 억새를 즐기러 온 등산객들이 분명하다. 그들이 관룡사를 배경으로 인증 샷을 남기는 동안 나그네는 한걸음 물러서서 관망한다.
좌측의 돌담길은 성체 같기도 하다. 햇볕에 드러난 야자매트 위에 은행 낙엽이 뒤엉켜 황금길이다. 삼각대 위 앵글 화면에 삼라만상이 들어와 있다.
관룡사 일주문은 돌담처럼 돌을 쌓아 올린 석문이 너무 낮다. 아마도 몸을 낮추고 경건한 마음으로 들어오라는 메시지를 담은 듯하다. 어쩌면 인생의 수많은 문을 지나갈 적에도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메시지 같다.

여행 TIP





남지수변역새전망대 표지판





남지수변역새전망대 표지판


창녕군 남지읍 남지리에서 용산리 일대. 전체 면적이 176만8000㎡(53만5000평)이며 서울 여의도 면적의 약 60% 규모라고 한다. 마산해양신도시 사업 규모 또는 창원대학교 교정의 2배를 능가하는 규모로 4대강 사업의 일환으로 낙동강 둔치에 조성됐다.





관룡사 전경





관룡사 전경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통일신라시대 8대 사찰 중 한 곳이다. 많은 문화유산과 주변 자연경관의 인문학적 가치가 인정돼 2023년 12월 28일 관룡사 일원이 국가지정문화유산 명승으로 지정됐다. 원효가 제자 송파와 이곳에서 백일기도 중 갑자기 연못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절 이름을 ‘관룡사(觀龍寺)’라 하고 산 이름을 구룡산(九龍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도희주(동화작가)
차상호 기자 cha83@knnews.co.kr 기자 admin@gamemong.inf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