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격변의 시대, 세상은 곳곳에서 뒤바뀌고 있습니다. 대중문화에서 그 역전의 순간을 포착해 사회·문화적 변화를 짚어 봅니다.




넷플릭스 미국 애니메이션 'K팝 데몬 헌터스' 주제가 '골든'을 불러 주목받은 작곡가 겸 가수 이재. SM엔터테인먼트에서 12년 연습생 신분으로 지냈지만 데뷔하지 못했다. 이재 사회관계망서비스 캡처


11억2,430만 원.
JYP엔터테인 한국릴게임 먼트(JYP)가 지난해 신인 개발비로 쓴 돈입니다. 올해 공시한 사업보고서에서 확인한 내용입니다. JYP엔 신인 개발본부가 있습니다. 오디션으로 선발된 연습생에 노래와 춤, 외국어 등을 가르칩니다. 두 대형 기획사 관계자에 물어보니 연습생 규모는 대체로 20여 명이라고 합니다. 30명이라고 가정하면, JYP는 연습생 한 명당 한 달에 약 312만 원을 레슨 바다이야기예시 비 등으로 쓴 셈입니다.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기획사 입장에서 연습생은 앞으로의 회사 성장을 이끌 핵심 '엔진'입니다. 개발과 투자가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JYP의 지난해 신인 개발비는 2023년(8억5,000만 원)보다 약 30% 증가했습니다.

한 달에 '312만 원' 투자받는데 왜 떠날까
황금성사이트
이렇게 K팝 기획사는 연습생 투자 비용을 늘렸지만, 정작 업계에선 연습생이 크게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지난 28일 다룬 '개천 용 서사'가 두드러졌던 K팝이 계급화되면서 벌어지는 다양한 변화('금수저' 몰리고, 부모는 '관리생' 자랑... '개천 용' 멈춘 K팝)를 취재하면서 확인한 또 다른 역전 현상이었습니다. 대중문화에서 역전의 순간 백경게임랜드 을 포착해 사회·문화적 변화를 짚어 보는 '역전' 코너 취재 일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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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의 실태는 이랬습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가장 최근 발표한 '대중문화예술산업 실태조사'를 보니, 기획사 소속 K팝 연습생 수는 2022년 기준 1,170명으로 2020년에 1,895명보다 725명이 줄었습니다. 2년 새 38.3%가 급감했습니다. 재벌가 자제뿐 아니라 그룹 라이즈 멤버 앤톤과 스테이씨의 시은 등 연예인 2세들도 아이돌그룹으로 줄줄이 데뷔하고 있습니다. 경제, 문화 권력을 쥔 '금수저' 청소년들의 연습생 진입은 늘고 있는데, 정작 일반 연습생 수는 빠르게 줄고 있는 겁니다. 내년 2월 열릴 미국 그래미 어워즈에 '아파트'와 '골든'이 나란히 '올해의 노래' 후보에 오르며 유례없는 호황기를 맞아 영향력과 산업 매출이 크게 는 것으로 알려진 K팝 시장에서 연습생은 갑자기 왜 줄었을까요. "(연습생 양성의) 비용 부담감이 커지는 것이 주요한 원인으로 보여진다"고 보고서는 분석했습니다.



불안과 우울을 호소한 연습생. 강원래씨가 쓴 논문 'K팝 아이돌 연습생 양성 체계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에 실린 사례다. 강씨 논문 캡처



"청소년 여자 연습생 10명 중 7, 8명 생리 불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따로 있었습니다. 이미 기획사에 소속된 연습생의 자발적 포기 비중이 34.4%로 집계됐습니다. 2020년 대비 증가(3.4%p)했습니다. 빛나는 미래를 꿈꾸다 중도에 꿈을 꺾은 청소년들은 왜 늘었을까요. 대형기획사들의 연습생 양성 환경은 좋아졌다고 하지만, 아직 상당수의 기획사에서 연습생은 열악한 처우를 받고 있었습니다. 댄스 듀오 클론 출신 강원래가 쓴 박사 학위 논문 'K팝 아이돌 연습생 양성 체계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2025) 속 사례 연구에 따르면, 청소년인 여자 연습생은 10명 중 7, 8명이 생리 불순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어리다 보니까 생리를 안 한다는 게 얼마나 문제인지 잘 모른다. 회사에선 (청소년) 여자 연습생의 생리 불순에 별로 관심이 없다. 오로지 몸매만 예쁘면 되니까"라는 게 여자 연습생이 털어놓은 고충이었습니다. "출근 오후 1시, 퇴근 오후 11시 사이에서 '알아서 연습해라' 이런 식이었다. 어떤 매뉴얼이나 프로그램이 있어서 트레이너에 지도를 받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며 주먹구구식 관리도 문제점으로 지적됐습니다. "춤을 출 때 숨을 참기 때문인데 대부분 연습생들이 과호흡 증상을 경험한다. 이걸 반복하다가 보니까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다"며 심리적 불안도 호소했습니다.
업계 관계자들 얘기를 들어보니 예상대로 준비 과정은 만만치 않아 보였습니다. 대형기획사 한 곳은 '9 투(to) 10'이었습니다. 오전 9시에 연습생들은 '출근 도장'을 찍습니다. 휴대폰을 제출한 뒤 오전에 영어 등 외국어를 배웁니다. 점심을 먹은 뒤 오후엔 보컬, 댄스 레슨을 받은 뒤 개인 연습을 추가로 합니다. 보통 끝나는 시간이 오후 10시라고 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해도 데뷔 기회를 잡는 건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골든'으로 세계를 들썩인 한국계 미국인 이재도 SM엔터테인먼트에서 12년 연습생 생활을 했지만 끝내 데뷔하지 못했습니다.



그룹 방탄소년단과 뉴진스 등이 속한 K팝 기획사 하이브는 아이돌을 꿈꾸는 청소년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곳 중 하나다. 서울 용산구 사옥 전경. 연합뉴스



어느 곳보다 '일찍 늙는' 청소년들의 걱정

연습생은 대부분 10대입니다. "스무 살이 넘으면 나이 들었단 눈치가 보여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어느 곳보다 '일찍 늙는' 환경, 부모의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청소년 연습생들은 다른 길을 준비하기 어렵습니다. 또래와 비교해 학교에서 정규 교육을 충실히 받지 못한 상황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하니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의대엔 일단 들어가면 대부분 의사가 되지만, 연습생은 기획사에 들어갔다고 해서 다 연예인이 되는 게 아닙니다. 데뷔하는 연습생보다 그렇지 못한 청소년이 더 많습니다.
산업 내 양극화와 계급화가 가속화되는 구조에서 안전망이 없는 연습생은 사회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드라마와 영화 내수가 꽁꽁 얼어붙어 한류 생산 기지에 빨간불이 켜진 것보다 청소년의 사회적 자립을 어떻게 도울지를 먼저 고민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대형 기획사부터 다양한 직업 교육 과정을 시범 삼아 운영해 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데뷔에) 실패하고 회사를 나가는 경우를 대비해서 직업 교육 같은 대안이 마련됐으면 좋겠어요. 아르바이트로 전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강씨가 쓴 논문에 사례자로 참여한 연습생의 말입니다. 청소년이 안전하게 꿈을 꿀 수 있을 때 건강한 K팝 환경이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요.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