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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비상식적인 일을 않았어. 뵙겠습니다. 슬쩍 긴김성민 브라질 동양한글학교 교장 (서울=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연합뉴스와 인터뷰하는 김성민(65) 브라질 동양한글학교 교장. 2025. 11. 26. phyeonsoo@yna.co.kr
(서울=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해외에서 50년 넘게 살았지만, 한글을 지키는 일은 제 삶의 소명이자 운명의 끈이었습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계속 손이 가고 마음이 가더군요."
53년 해외 이민의 굴곡진 삶 속에서도 남미 한글학교의 버팀목으로 우뚝 서 온 김성민(65) 브라질 동양한글학교 교장은 26일 서울 중구 종이나라박물관에서 바다이야기무료머니 열린 '제15회 지구촌한글학교미래포럼' 주제 발표를 마친 뒤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글학교 교장 22년, 남미한글학교협의회 회장 4년을 지내며 남미 한인사회 한글 교육의 최전선에 섰던 그는 "이민을 다섯 번이나 했지만 한글학교만은 떠나지 못했다"며 웃었다.
부친이 아르헨티나 동포교회 담임목사로 초청받아 떠 카카오야마토 난 1973년이 그의 첫 이민이었다. 만 15세 소년은 처음 타는 비행기가 그저 신기해 목적지의 언어나 제도도 모른 채 대구를 떠났다.
종이박물관 전시실에서 포즈를 취한 김성민 교장 (서울=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김성민 브라질 동양한글학교 교장이 26일 서울 중구 종이 바다이야기2 나라박물관 전시실에서 포즈를 취했다. 2025. 11. 26. phyeonsoo@yna.co.kr
일본·타히티·페루·칠레를 거쳐 사흘 만에 도착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그러나 '새로운 삶'은 혹독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중학교 졸업장이 인정되지 않아 "초등학교 1학년부터 다시 다녀라"는 통보를 릴게임하는법 받았다.
"어디서 왔느냐고 해서 '코레아'(Corea)라고 했더니 국가를 모른다는 겁니다. 학력이 인정 안 되니 학교를 포기하고 생업에 뛰어들었죠."
그는 편물, 바느질, 자수 미싱 등 의류 하청업을 전전하며 10대를 보냈다. 1976년 무렵 한국 학력이 뒤늦게 인정되면서 중학교 4학년에 재입학했고, 국립 부에노스아이레 바다신2게임 스 공대까지 진학했다. 그러나 부친이 미국으로 재이주하면서 두 번째 이민이 시작됐다.
미국에서는 언어 장벽에 막혀 전공을 잇지 못했고, 방황 끝에 그래픽 디자인을 배워 작은 인쇄소를 운영했다. 7년 뒤 그는 또다시 브라질로 향했다. 장가를 가지 못하는 아들을 걱정한 부친이 '믿음 깊은 장로의 딸'을 소개했고, 결혼 이후 다시 미국으로 이민을 결정했다.
'남미 한글학교 성과와 과제' 주제발표하는 김성민 교장 (서울=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26일 서울 중구 종이나라박물관에서 열린 '제15회 지구촌한글학교미래포럼'에서 김성민 브라질 동양한글학교 교장이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2025. 11. 26. phyeonsoo@yna.co.kr
하지만 미국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장시간 노동에도 수입이 변변치 않아 아내는 "브라질로 돌아가자"며 눈물을 보였다. 결국 미국과 브라질을 오가는 이민이 반복됐고, 사업이 성공해 수백만 달러를 모았을 때 그는 다시 미국으로 향했다.
그러나 LA 자바시장(의류도매시장)에서의 도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빚이 쌓이고 아내는 심한 스트레스로 쓰러졌다. 결국 모든 것을 정리하고 2003년 다시 브라질로 내려온 것이 그의 '다섯 번째 이민'이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 바로 지금의 동양한글학교다. 교회에서 토요일마다 학교를 맡아줄 사람이 없어 "목사님이 부탁하니 고사할 수 없어" 시작했던 일이 평생의 소명이 됐다.
"한국에서 중학교만 졸업했고 교사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이 일을 할 사람은 저밖에 없었어요. 160명 넘던 학생과 15명의 교사가 함께했죠. 월급 없이 20년 넘게 했지만,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이후 남미한글학교협의회 회장을 맡아 12개국 가운데 브라질 26개, 아르헨티나 18개 학교, 칠레·파라과이·볼리비아·우루과이·페루 등 9개국 55개 학교 네트워크를 구축해 교사 연수를 주도했다.
'제15회 지구촌한글학교미래포럼' 참가자들 (서울=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26일 서울 중구 종이나라박물관에서 열린 '제15회 지구촌한글학교미래포럼' 참가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서 2번째가 김성민 브라질 동양한글학교 교장. 2025. 11. 26. phyeonsoo@yna.co.kr
그는 "남미 교사 연수는 단순한 공부가 아니라 서로의 이민 삶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자리"라며 "20년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한 볼리비아 선생님처럼, 헌신으로 버티는 분들이 많다"고 했다.
그러나 한글학교 현실은 녹록지 않다. 브라질 교포는 30년 전 5만 명에서 현재 3만 명 미만으로 줄었고, 아르헨티나도 절반 이하로 감소했다. 한국의 복지 제도에 매력을 느껴 한국으로 귀환하는 동포가 늘면서 남미지역 한글학교 학생 수도 감소세다.
"우리 교회만 해도 유초등부·중등부 한인 자녀가 100명이 넘는데, 한글학교에 오는 아이는 20명도 안 됩니다. '한국에서 살 것도 아닌데 왜 배우냐'고 묻는 젊은 부모도 있어요."
반면 브라질 현지인의 '한국어 열풍'은 뜨겁다. 상파울루 한국교육원에는 2천명이 넘는 현지인 신청자가 몰렸고, 한국문화·K팝의 확산으로 한국어 학습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럼에도 김 교장은 "한글학교의 핵심 대상은 동포 자녀"라고 말한다.
브라질 동양한글학교 수업 모습 [브라질 동양한글학교 제공]
"현지어로만 교육하면 언어·정체성 단절은 피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2천 년 동안 언어를 지켰듯, 우리 디아스포라도 한국어를 이어야 합니다."
한글학교를 운영하는 브라질의 대형 교회들이 한글교육보다 현지어 교육을 강화하며 한글학교를 없애는 흐름에도 그는 위기감을 느낀다.
김 교장은 "세대가 바뀔수록 혼혈·다문화 가정 증가로 한글 전승은 더욱 어려워진다"며, 하지만 조부모가 한국에 있는 가정의 아이들은 한국어 능력이 확연히 뛰어나다고 했다.
"해외 이민 50여년 동안 한국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제 학력을 인정해주지 않던 나라들이 이제는 한국을 부러워합니다. 우리나라가 계속 잘 살아야 동포 차세대들도 모국을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는 2017년 대한민국 종이접기 강사와 사범마스터 자격증도 취득해 2020년부터 재단법인 종이문화재단·세계종이접기연합 브라질 지부장을 맡아 종이접기를 남미에 전파하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그는 "종이접기는 차세대들에게 창의성을 길러주고, 한인의 정체성을 심어줄 수 있는 훌륭한 수업 도구"라고 강조했다.
한글학교 학생들이 종이접기로 만든 크리스마스 트리 [브라질 동양한글학교 제공]
22년간 월급도, 퇴직금도 없이 한글학교를 지켜온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잠시 생각하더니 웃으며 답했다.
"아직 마지막 이민이 남아 있습니다.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가겠죠. 하지만 그때까지, 어디에 살든 한글을 지키는 일만큼은 끝까지 이어갈 겁니다."
phyeonsoo@yna.co.kr
▶제보는 카톡 okjebo 기자 admin@slotnara.info
(서울=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해외에서 50년 넘게 살았지만, 한글을 지키는 일은 제 삶의 소명이자 운명의 끈이었습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계속 손이 가고 마음이 가더군요."
53년 해외 이민의 굴곡진 삶 속에서도 남미 한글학교의 버팀목으로 우뚝 서 온 김성민(65) 브라질 동양한글학교 교장은 26일 서울 중구 종이나라박물관에서 바다이야기무료머니 열린 '제15회 지구촌한글학교미래포럼' 주제 발표를 마친 뒤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글학교 교장 22년, 남미한글학교협의회 회장 4년을 지내며 남미 한인사회 한글 교육의 최전선에 섰던 그는 "이민을 다섯 번이나 했지만 한글학교만은 떠나지 못했다"며 웃었다.
부친이 아르헨티나 동포교회 담임목사로 초청받아 떠 카카오야마토 난 1973년이 그의 첫 이민이었다. 만 15세 소년은 처음 타는 비행기가 그저 신기해 목적지의 언어나 제도도 모른 채 대구를 떠났다.
종이박물관 전시실에서 포즈를 취한 김성민 교장 (서울=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김성민 브라질 동양한글학교 교장이 26일 서울 중구 종이 바다이야기2 나라박물관 전시실에서 포즈를 취했다. 2025. 11. 26. phyeons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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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남미한글학교협의회 회장을 맡아 12개국 가운데 브라질 26개, 아르헨티나 18개 학교, 칠레·파라과이·볼리비아·우루과이·페루 등 9개국 55개 학교 네트워크를 구축해 교사 연수를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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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브라질 현지인의 '한국어 열풍'은 뜨겁다. 상파울루 한국교육원에는 2천명이 넘는 현지인 신청자가 몰렸고, 한국문화·K팝의 확산으로 한국어 학습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럼에도 김 교장은 "한글학교의 핵심 대상은 동포 자녀"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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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간 월급도, 퇴직금도 없이 한글학교를 지켜온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잠시 생각하더니 웃으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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