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격투기의 성지’로 불리는 일본 도쿄 분쿄구 고라쿠엔홀. 1400여 좌석을 빼곡히 채운 관중의 열기 속에 링을 포함한 대부분 공간이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관중의 웅성임도 잠시, 일반 선수와는 사뭇 다른 복장을 한 두 남성이 링에 올랐다. 그들의 주먹과 다리에서는 스타워즈 광선검을 떠올리게 하는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쓰에다 후미노리(오른쪽)씨가 10일 일본 도쿄 고라쿠엔홀에서 열린 시각장애인 킥복싱 매치 ‘로 비전(low vision) 킥복싱’에서 나리사와 슌스케씨에게 발차기 공격을 하고 있다. 링 바다이야기예시 에 오른 두 사람은 ‘망막색소변성증’이란 난치병을 가진 시각장애인으로 글러브와 정강이 보호대에 부착한 LED 불빛을 인식하며 경기를 치렀다./히가시스포웹


링에 오른 이는 나리사와 슌스케씨와 마쓰에다 후미노리씨. 1962년 개장 이래 복싱과 프로레슬링, 종합격투기 등 수많은 명승부를 빚어낸 ‘성지’에 릴게임야마토 오른 두 선수는 ‘망막색소변성증’이란 난치병을 앓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 질환은 망막 기능이 저하돼 아주 밝은 빛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는 병이다. 암전된 경기장에서 두 선수는 서로의 주먹과 다리에서 나오는 빛에 의지해 비록 느린 속도였지만 온 힘을 다해 주먹과 발차기를 주고받았다. 관중 또한 두 선수의 몸이 아닌 공중을 가르는 빛의 궤적을 야마토연타 좇으며 숨을 죽였다. 마쓰에다씨가 강한 미들킥(옆구리 차기)으로 나리사와씨를 쓰러뜨리자 경기장은 떠나갈 듯한 환호로 뒤덮였다.
이날은 일본 프로레슬링 단체 제로원(ZERO1)과 노아(NOAH)의 단체 대항전이 열린 날이었다. 나리사와씨와 마쓰에다씨의 대결은 모든 대전이 끝난 뒤 ‘이벤트 매치’로 치러졌다. 경기는 단 1라운드, 3분. 공식 백경게임랜드 승패도 발표되지 않았다. 하지만 경기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리자 프로 대회 못지않은 감동 섞인 함성과 박수 갈채가 쏟아졌다.
경기를 마치고 불이 다시 켜진 링 위에 나란히 선 두 선수는 “인생에서 가장 긴 3분이었다”며 함께 웃었다. 나리사와씨는 “사람들은 우리가 ‘빛밖에 볼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반대”라며 “빛만 있으면 무 바다이야기고래 엇이든 할 수 있다. 그 가능성을 믿고 앞으로도 계속 재밌는 일에 도전하겠다”고 했다.
세 살 때 망막색소변성증 진단을 받은 그는 자신과 비슷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돕는 생활 지원 컨설팅 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볼링으로 운동의 재미를 느꼈다는 그가 킥복싱의 매력에 빠져든 것은 3년 전부터다. 주변 도움을 받아 간단한 펀치와 발차기부터 배웠다는 그는 “볼링은 공을 던지고 핀이 쓰러질 때까지 시간이 걸려 (운동한다는) 실감이 잘 안 나는데, 킥복싱은 소리와 감촉을 동시에 느낄 수 있어 훨씬 즐겁다”고 했다.
그런 나리사와씨의 사연을 접한 오치아이 요이치 쓰쿠바대 교수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미디어 아티스트로도 활동하는 그가 시각장애인도 격투기를 즐길 수 있도록, 강한 빛을 내는 LED를 부착한 특수 글러브와 정강이 보호대를 개발한 것이다. 이 소식에 프로레슬링 단체 제로원이 나리사와씨 측에 대회 개최를 제안했고, 이날 세계 최초의 시각장애인 킥복싱 매치 ‘로 비전 킥복싱(Low Vision Kick Boxing)’이 열리게 됐다.
이날 나리사와씨를 상대한 마쓰에다씨는 30대에 들어서서 질환이 발병한 경우다. 현재 그는 5% 정도만 볼 수 있다고 한다. 지난해 나리사와씨의 권유로 킥복싱을 시작한 그는 이 운동이 자신의 삶을 “180도 바꾸어 놓았다”고 말했다. “처음 시력을 잃었을 땐 ‘이제부터 할 수 없게 된 일’만 떠올리며 극단적인 생각도 했어요. 하지만 킥복싱을 하는 순간만큼은 제 장애가 전혀 장애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다 보면, 언젠가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될 날이 올 거라 믿습니다.” 기자 admin@slotnara.inf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