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베이 신야.


"세계적인 산악인의 아들이라는 게 그땐 너무너무 싫었습니다. 물론 부모님한테 끌려가듯이 갔던 산 또한 싫었고요."
문득 얼마 전에 본 통계 하나가 떠올랐다. <2024 등산 경험 및 등산 문화 관련 인식 조사>다. 이에 따르면 비자발적으로 산에 끌려갔던 이들 중 30.3%는 그래도 나중에 또 등산을 해볼 생각이 있다고 했고, 57.7%는 다신 안 가겠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등산은 체력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갑자기 도전하기에는 무척 강도 높은 운동이니 수긍이 가는 비율이다.
그런데 에베레스트 여성 초등, 세계 7대륙 최고봉 여성 초등을 기록한 세계적인 산악인의 피를 물려받은 아들의 입에서 산도, 엄마도 싫었다는 말이 나온 것은 무척 의외였다. 다베이 준코의 아들, 다베이 신야다.
지난 9월 열린 울산울주세계산악영화제에서 개봉한 영화 <인간, 다베이 준코>에선 다베이 신야의 사연을 좀더 긴 호흡으로 만나볼 수 있었다. 영화에서 는 산악인으로서 산을 오른 다베이 준코의 영웅서사보다는 산악인이면서 동시에 가족의 일원이자 어머니의 모습을 좀 더 강조해서 재현했다.



생전의 다베이 준코.


올해는 다베이 준코의 에베레스트 여성 초등 50주년이기도 해서 더 의미가 깊은 영화다. 아시아산악연맹에서는 영화 상영 직전에 그녀의 도전 정신을 기리는 '다베이 준코상'이란 상을 신설해 남극대륙 횡단에 성공한 김영미 대장에게 수여하는 행사를 열었다. 아시아 여성산악인들의 등반과 탐험, 문화활동을 지원한다는 취지다. 김영미 대장은 "다베이 준코를 지리산에서 한 번, 알프스에서 한 번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며 "굉 장히 겸손하고 다정하며 따뜻했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산을 시작할 때 초심을 일깨워 주는 롤 모델인 사람이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다음은 영화 상영 후 다베이 신야와의 일문일답.



영화 '인간, 다베이 준코' 스틸컷.


영화가 실화를 어느 정도 반영했나요?
영화 내용이 거의 대부분 사실입니다. 백분율로 말하자면 90%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볼 때마다 제 옛날 모습이 참 한심하게 느껴지고 또 엄마 생각을 많이 하게 되네요.
(영화에서 다베이 신야는 극도로 반항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학교에서는 노랗게 머리를 물들이고 귀를 뚫은 채 책상을 발로 걷어차며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종국에는 엄마와 같이 살기 싫다며 따로 살림을 차려 독립해 생활하게 된다.)



영화 '인간, 다베이 준코' 스틸컷.


왜 그렇게 어머니가 싫었나요?
정확하게는 어머니 자체가 싫은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아들인 것이 싫었던 거죠. 사람들이 늘 '너는 세계적인 산악인의 아들'이라면서 어머니와 비교하고, 평가하고 그랬는데 그게 너무 싫었습니다. 다베이 준코의 아들이니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둥의 말들이 그때는 참 듣기 싫더라고요.
배우들의 연기는 어땠습니까?
(영화에는 실제 인물이 출연하지 않고 배우들이 연기했다.)
어머니 역할을 맡았던 요시나가 사유리(1945년생으로 올해 80세)씨는 직접 집에 찾아와서 '이런 장면에서 왜 이런 말을 했는지', 또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는지' 다양한 질문을 집요하게 하셨어요. 또 인상 깊었던 건 아버지 역할을 맡았던 사토 코이치씨입니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아버지는 등반 중 동상에 걸려 발가락을 잃은 산악인이거든요. 이 점에 착안해서 발가락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걷는지까지 세세하게 질문하고, 그걸 그대로 연기에 반영하는 모습이 무척 감탄스러웠습니다.
영화에서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장면은 수술 후 병원에서 재활하는 장면입니다. 반드시 후지산에 올라야 한다면서 이를 악물고 걸음을 내딛는 장면인데요. 당시 상황이 기억나시나요?
(다베이 준코는 2012년 복막암에 걸려 2016년 사망하기까지 4년간 투병 생활을 했다. 이에 앞서 2011년 다베이 준코의 고향인 후쿠시마에서 대지진이 발생한 바 있다. 그는 고향 사람 수십 만 명이 집을 잃고 좌절하고, 또 부모를 잃었거나 피해를 본 학생들도 많은 것을 보면서 이들을 위해 무언가 할 일이 없을까 고민했다. 그리고 이런 학생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활기를 되찾게 돕고자 후지산 등정을 같이 하는 캠페인을 매년 개최한 바 있다. 심지어 투병생활 중에도.)
영화에서 나온 장면은 암 부작용으로 복수가 굉장히 많이 찼었던 때를 담았던 겁니다. 제 기억으로는 4L나 복수를 빼고 나서도 곧장 후지산에 올라야 한다면서 재활하려고 걸으셨었어요.
도대체 왜 그렇게 산에 가려고 하는지 궁금해서 직접 물어봤죠. 어머니는 '내가 나고 자란 환경과 또 다른 환경을 봤을 때 너무나 큰 감동을 느끼곤 했었다. 그 감정을 꼭 어린애들한테도 보여 주고 싶고, 아이들이 느끼는 감동을 통해서 나도 예전에 느꼈던 그 감동을 같이 누리고 싶기에 꼭 가고 싶다'고 답하셨습니다.
어머님 사후에는 현재 이 후지산 산행을 직접 맡아서 현재까지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어릴 땐 산이 싫다고 하셨었는데요. 어머니와 같이 산에 갔던 기억이 썩 유쾌하지 않았나요? 처음 같이 오른 산은 어땠나요?
처음 산에 갔던 기억은 없습니다. 저도 물어본 적 있는데 사진 한 장을 보여 주더라고요. 후쿠시마의 아다타라라는 산에서 찍은 건데 주변에는 방한장비를 철저하게 갖춘 산악인들이 잔뜩 있는 가운데 어린 아기인 저는 정작 엄청 얇은 옷을 입고 안겨 있는 모습이었죠. 이게 제 인생 첫 등산이었답니다.
사실 어릴 때 저희 가족 모두는 산에 가는 걸 '등산 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그냥 '여행 간다'는 쪽으로 여겼었습니다. 그래서 주말 아침 갑자기 외출하자고 해서 차에 타서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떠보면 하코다라는 큰 산 밑에 도착해 있었다거나, 또 '여행 가자'란 말에 가보니 나가노에 있는 하쿠바계곡을 종주하곤 했어요. 이제 왜 제가 산이 싫다고 했는지 아시겠죠? (웃음)
하지만 마냥 싫진 않았어요. 산에 대해서 조금 알기 시작한 무렵부터는 힘들게 한 발 한 발 내딛어 정상까지 갔을 때 성취감, 내가 뭔가를 해냈다는 그런 만족감이 무척 좋게 다가왔거든요. 그러면서 부모님이 왜 산을 좋아했는지, 또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게 돼 저 또한 굉장히 산이 좋아졌죠.



영화 '인간, 다베이 준코' 스틸컷.


산을 어릴 때부터 꽤 잘 알았을 텐데, 어머니가 원정을 갈 때 혹 걱정이 된다거나 하진 않았나요?
말했듯이 저희 가족은 산에 가는 게 여행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위험하다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대신 한 가지 룰이 있었죠. 집을 나갈 때 꼭 얼굴을 보여 주고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의미냐면, 만약 조난당했다가 누군가가 발견하게 되면 그때 우리 가족 중 누구인지 바로 확인해 줄 수 있도록 복장을 외워두자는 거였어요. 그러면서 늘 목숨과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계속 가르침을 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현재 후지산 등반 프로젝트를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도맡아 10년 가까이 계속 이어오고 있는데요. 그중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두 명이 바로 떠오르네요. 한 명은 캠페인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온 학생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자발적으로 참가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소위 '끌려오는'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친구는 굉장히 불량스럽고 반항을 좀 하더라고요. 입에 '귀찮다, 힘들다'는말을 달고 있었고요. 그래도 어떻게 정상에 올라갔는데 휴대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어서 누구한테 보내더라고요. 그래서 장난삼아 '여자친구한테 보내는 거냐?'고 말을 붙여봤는데 '좀 조용히 해주세요'라며 퉁명스럽게 말을 막았었습니다.
어찌된 사연인지 몰랐는데 2주 후에 그 학생의 어머니한테서 편지를 받았어요. 아버지가 후쿠시마 대지진으로 돌아가셨더라고요. 그리고 정상에서 보낸 문자는 어머니한테 보내는 거였고, 생전에 후지산에 올라보고 싶었다는 아버지의 말이 생각나서 유품인 휴대폰을 들고 올랐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엄마한테 거의 문자를 하지 않는 반항적인 아들인데 이런 고마운 문자를 받게 됐다면서 고맙다는 내용이 마지막으로 적혀 있었죠.
또 하나는 한 어린 여학생입니다. 이 학생도 지진으로 아버지를 잃었는데, 여태껏 시신을 못 찾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등반을 끝내고 돌아갈 때 너무너무 해맑고 예쁜 얼굴로 정말로 감사했다고 인사하고 가는데 그게 자꾸 생각이 나더라고요. 저 같은 경우에는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셨기에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볼 수 있었는데 이 친구는 갑자기 사고가 일어난 거잖아요? 얼마나 마음이 아플지 짐작도 안 되는데 너무 예쁜 표정으로 감사하다고 해줘서 무척 감동스러웠습니다.
현재까지 몇 명 정도 후지산 등반을 같이 했나요?
한 번에 약 100명씩, 총 800명과 함께 올랐습니다. 중간에 코로나 때문에 후지산 등산이 금지된 탓에 처음 시작한 연도에 비해 많이 못했어요. 등산금지 조치가 풀린 이후에도 버스에서 옆 좌석을 비워야 한다는 식의 규제가 많아서 적은 인원으로 진행한 적도 많고요.
또 재미있는 수치가 하나 있습니다. 후지산 등정률이 평균적으로 70% 정도인데 저희는 지금까지 100%, 그 누구도 다친 사람 없이 정상에 올랐어요. 천천히, 천천히 계속 격려하면서 가는 걸 기조로 삼고 운행하니 이런 등정률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아시아산악연맹으로부터 다베이 준코상을 받은 김영미 대장(가운데). 왼쪽은 이인정 회장.


이제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후지산 등반 프로젝트를 계속 이어나가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 자신도 후쿠시마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피해자 중 한 명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흔은 아직도 제 고향 곳곳에 남아 있어요. 그러니 고향 후배들이 어떻게든 건강과 행복, 용기를 되찾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저한테 말한 것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내가 죽으면, 너 이제 이거 안 할 거지?"라고 슬쩍 떠보시더라고요. 아들이 당연히 반항할 것이란 걸 알고 한 말 같아요. 그 덕에 지금까지 계속 진행하고 있네요. (웃음)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어머니의 이야기를 이렇게 영화를 통해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도 다시 전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기쁘고 감사드립니다. 영화에서도 나온 어머니의 말을 한 번 더 전하고 싶어요. "병에 걸려도 환자가 되지 않겠다"는 말이죠. 고난이 오더라도 스스로 선택하고, 좌절하지 않고, 계속 살아가겠다는 치열한 의지가 담긴 말입니다. 또 가능하다면 저희 후지산 등반 프로젝트에도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늘 자금난이거든요. 하하.
월간산 11월호 기사입니다. 기자 admin@gamemong.info